[신앙에세이] 통독, 180일 간의 여정을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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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180일간의 성경통독 완주를 축하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기나긴 말씀의 여정을 무사히 마친 성도들에게 축하 선물이 전해지며, 서로의 인내와 수고를 격려하는 훈훈한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이 뜻깊은 현장에서, 모태신앙으로 40년 만에 이제서야 첫 성경통독을 마친 소감을 여러분과 나누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사실 저에게 성경통독 이야기만 나오면 좀 작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외할머니부터 따지면 3대째 그리스도인이건만 왠지 실속 없는 그리스도인 같았습니다. '내가 일평생 과연 한 번은 할 수 있을까? 그래도 명색이 교인인데 한 번은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꼭 한 번은 풀어야 할 인생 숙제 같이 느껴졌습니다. 시도는 여러 번 했습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는 너무 재밌었고 이미 열 번은 읽은 것 같습니다. 레위기. 비슷비슷해 보이는 제사 방법들이지만, 그래도 참고 읽을 만합니다. 민수기. 내 친척 이름도 다 모를 판에 수천 년 전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의 이름과 숫자를 읽다 보면 이게 왜 성경에 들어갔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래도 꾹 참고 읽습니다. 신명기, 여호수아부터는 다시 이야기라 재밌긴 한데, 내용만 조금 바뀔 뿐 실수하고 혼나고 회복하는 내용의 반복입니다. '왜 저러나' 싶습니다. 아주 답답한 마음으로 읽어 가다 보면 어느새 다윗의 이야기에 도달하고 솔로몬까지는 재밌게 읽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는 저도 잘 모릅니다. 항상 그쯤 어딘가에서 막혔거든요. 몇 번 실패 후 신약부터 읽자 싶어서 마태복음부터 시작했는데, 여긴 4복음서가 끝나면 늘 그쯤에서 끝났습니다. 통독 도전에 실패가 반복될수록 다시 시작하기까지 텀이 길어졌고, 나중엔 시작조차 안 한 지 몇 년이나 흘렀는지 기억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다 영상을 따라 성경을 쭉 읽어가며 통독을 한다고 해서 '내 인생 숙제를 할 때가 이때구나' 싶었습니다. 위기는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처음 시작 땐 직장 생활 중이었고 점심시간을 쪼개서 읽었습니다. 하지만 ...

[주일설교요약] 당신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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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도행전 7:9-16 시기심이 낳은 비극, 부패한 본성의 민낯   스데반의 설교는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을 지나 자연스럽게 열두 족장과 요셉의 이야기로 흘러갑니다. 성경은 믿음의 계보를 잇는 족장들이 동생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의 노예로 팔아넘긴 끔찍한 사건을 숨기지 않고 담담히 고발합니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이라 할지라도, 그 내면에는 형제를 팔아넘길 만큼 지독한 시기심과 부패한 본성이 도사리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무력한 우리 인간의 진짜 모습입니다. 인간의 악을 뒤집으시는 하나님의 섭리   형제들은 요셉을 버렸지만, 하나님의 일하심은 인간의 악함이나 실패 때문에 멈추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라는 짧고 강력한 문장으로 상황의 반전을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철저히 버려진 요셉과 동행하셨고, 그를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죄수로, 노예로 전락했던 그에게 은혜와 지혜를 주시어 마침내 애굽의 총리, 즉 세상을 기근에서 살려낼 구원자로 준비시키셨습니다. 인간의 치명적인 죄악마저도 선용하시어 생명을 살리는 통로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기근 속에서 마주한 과거의 부끄러움   시간이 흘러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극심한 흉년이 덮칩니다. 먹을 것이 없어 죽음의 위기에 처한 형제들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향했고, 마침내 자신들이 팔아넘겼던 동생 앞에 엎드리게 됩니다. 살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자신들의 가장 추악한 과거와 죄악이 낱낱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형제들에게 그 자리는 얼마나 두렵고 참담했을까요. 하지만 그들은 살기 위해, 그 지독한 부끄러움을 감수하고서라도 엎드려야만 했습니다. 복수 대신 내어준 양식, 십자가의 은혜   놀랍게도 형제들이 마주한 것은 복수의 칼날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과거의 죄를 묻는 대신 형제들을 끌어안고 함께 울며 생명의 양식을 넉넉히 내어줍니다. 형제들에게 버림받았으나 마침내 그들을 살려낸 요셉...

[씨앗칼럼] 영혼의 맛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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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 "맛집"을 검색합니다. 낯선 동네에 가도, 휴가지에 가도, 심지어 점심 한 끼를 위해서도 휴대폰을 들여다봅니다. 별점이 몇 점인지, 줄을 얼마나 서는지, 가격은 합리적인지. 그렇게 우리는 맛과 값을 따라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교회 식구들도 함께 "맛집"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찾는 맛집은 조금 다릅니다. 혀끝이 아닌 마음으로, 가격이 아닌 사랑으로 가는 곳. 우리는 그곳을 "영혼의 맛집"이라 부릅니다. 늘 다니던 식당, 머리를 자르러 가는 미용실, 잠깐 들르는 편의점—그 익숙한 자리들이 어느새 영혼 구원의 현장이 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얼마 전 한 목사님께 잊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영혼을 품고 10년을 한결같이 찾아가셨다는 것입니다. 한두 번 전도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수십 번을 다시 찾아가 안부를 묻고 마음을 나누셨다고 합니다. 그 긴 시간을 묵묵히 걸으신 발걸음 끝에 마침내 그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는 열매가 맺혔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 깊은 곳이 뜨거워졌습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이만큼의 사랑과 인내가 필요하구나." 우리가 너무 쉽게 포기하고, 너무 빨리 돌아섰던 자리들이 떠올랐습니다. 한 사람을 품는다는 것은 그렇게 오래 기다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우리의 발걸음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맛과 값을 따라가던 걸음이, 영혼을 향한 걸음으로 바뀐 것입니다. 어느 날 한 곳, 또 다른 한 곳. 우리 주변에 영혼의 맛집이 하나둘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곳들을 함께 찾아갑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한 번이 아니라 꾸준히. 시간이 흐르면서 참 신기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늘 무뚝뚝하시던 주인분이 먼저 인사를 건네시고, 잠깐 들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마음을 여시고, 어떤 날은 사는 이야기, 자녀 이야기, 아픈 이야기까지 흘러나옵니다. 관계가 열린다는 것은 이렇게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

[신앙에세이] 씨앗교회에 온: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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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는 거의 10년 가까이 믿고 머리를 맡기는 단골 미용실이 있습니다. 'ON:EU(온이유)'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곳인데, 이름만큼이나 마음씨가 곱고 아름다운 은영 원장님이 계신 곳입니다. 언제나처럼 미용 중 이런저런 수다가 오가다가, 우연히 미용 봉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교회 어르신들을 위한 미용 봉사를 부탁드렸을 때, 원장님은 흔쾌히, 그리고 참 맑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봉사 당일, 감사하게도 든든한 직원분과 함께 두 손 무겁게 씨앗교회 소그룹실을 찾아와 주셨습니다. 소그룹실은 금세 작은 미용실로 변신했습니다. 기대에 웃음꽃을 피우시며 교회를 찾아주신 어르신들, 사이좋게 손님이 된 엄마와 아들. 소박한 공간에 사람들의 온기가 가득 채워졌습니다. 물론 처음 해보는 행사라 작고 귀여운 실수도 있었습니다. 하필이면 볕이 꽤나 뜨거웠던 날, 에어컨을 빵빵하게 튼다고 틀었는데도 땀이 뻘뻘 흘렀습니다. 좁은 공간에 문을 닫을 수 없어서 날이 매우 더워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는데, 잠시 후 확인해 보니 온도만 낮추고 모드를 에어컨이 아닌 히터로 둔 거였습니다. 머쓱해하며 상황을 설명해 드리니, 방 안에는 한바탕 시원한 웃음꽃이 터졌습니다. 잠시 땀을 쏙 빼게 해 드려 죄송했지만, 덕분에 어색했던 공기가 금세 훈훈하게 녹아내렸습니다. 이날 가장 제 마음을 울렸던 건, 한 할아버님의 환한 미소였습니다. 의자에 앉아 묵묵히 가위질 소리를 들으시던 할아버님은, 단정하게 정리된 거울 속 당신의 모습을 보며 무척이나 기뻐하셨습니다. "내 평생 살면서 이렇게 정성 들여서 머리를 잘라준 미용은 처음이네요." 할아버님의 그 한마디에 원장님의 가위질하던 손끝에도, 지켜보던 제 마음에도 뭉클한 감동이 번졌습니다. 사실 할아버님께서 더욱 기뻐하셨던 이유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곁에서 평생을 함께해 온 아내분이 거동이 불편하셔서 미용실에 가기 어려우셨는데, 감사하게도 원장님과 직원분께서 직접 댁으로 방문해 할머니의 머리까지 곱게...

[주일 설교 요약] 약속을 향해 걷는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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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도행전 7:1-8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공의회 앞에 선 스데반은, 성전과 율법을 모독했다는 자신을 향한 억울한 고소 앞에서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이스라엘 신앙의 뿌리인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자신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믿음의 조상이 어떻게 부름을 받았고 어떻게 걸어갔는지를 반추하며, 종교적 껍데기에 갇힌 그들에게 '진짜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직면하게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알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상을 깎아 팔던 우상의 땅, 메소포타미아에 살았습니다. 그가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 척박한 땅으로 먼저 찾아가셔서 신앙의 여정을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스데반이 이 사실을 짚은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지은 '성전'이라는 건물 안에만 갇혀 계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역시 내가 잘나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자격 없는 나를 먼저 찾아와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었음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났지만, 살기 좋고 풍요로운 상업 도시 '하란'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가 다시 약속의 땅으로 걸음을 옮길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데라의 '죽음' 이후였습니다. 내 삶을 지탱하던 과거의 힘, 세상의 가치관, 익숙한 안락함이 깨어지고 부서지는 경험을 통과해야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이끄시는 진짜 약속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순종하며 걸어온 아브라함에게 손바닥만 한 땅도 주지 않으셨고, 당장 눈에 보이는 자식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그의 후손들이 400년 동안 끔찍한 종살이를 하게 될 것이라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암담한 미래를 예고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하나님은 그 고난의 풀무불을 지나 그들을 반드시 구원해 내심으로써,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진짜 백성'을 만들어내고자 하셨기 때...

[씨앗 칼럼] 일상의 작은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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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 교회는 동네 어르신들의 머리를 곱게 손질해 드리는 섬김의 자리를 마련합니다. 거창한 행사도, 큰 프로그램도 아닙니다. 그저 어르신 한 분의 머리를 정성껏 만져드리고, 따뜻한 차 한 잔 건네며 안부를 묻는 작은 자리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자리에 하나님께서 어떤 만남을 예비해 두셨을지,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생각해 보면 이 자리도 누군가의 작은 걸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늘 다니던 미용실에서 미용사님과 나눈 평범한 대화 한 토막. 그 짧은 순간을 하나님은 그냥 흘려보내지 않으시고, 한 영혼을 향한 통로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의 일상에 우연은 없습니다. 출근길에 마주치는 이웃, 시장에서 인사를 나누는 상인, 자주 가는 가게의 주인 — 그 평범한 만남들 위에 하나님은 조용히 일하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살아가는 그 자리가 이미 선교지입니다. 대단한 일을 해야만 영혼을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소 한 번, 따뜻한 인사 한 마디, 진심 어린 안부 한 줄. 그 작은 것들을 하나님은 귀하게 쓰십니다. 오늘 우리가 어르신들의 머리를 빗어드리는 손길도 그렇습니다. 가위질 한 번, 거울 너머의 미소 한 번에 예수님의 사랑이 담길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자리를 찾아오실 어르신 한 분 한 분을 마음에 품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여러분 각자가 매일 만나는 그 한 사람을 위해서도 함께 기도합시다. 하나님은 분명 그 기도 위에 또 다른 만남의 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주일 설교 요약] 위기 앞에 서는 진짜 그리스도인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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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도행전 6:8-15 ​사도행전 6장의 이야기가 흐르는 가운데, 우리는 지난주 일곱 집사 선출과 교회의 부흥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흥미롭게도 그 부흥의 역사가 기록되자마자, 연이어 스데반이라는 한 인물의 위기를 클로즈업합니다. 스데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은혜와 권능으로 사람들 앞에 섰고, 그를 통해 큰 기사와 표적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 강력한 생명의 능력은 역설적으로 세상의 맹렬한 거부감을 불러왔습니다. ​자유인 회당 소속 유대인들은 스데반의 논리를 당해내지 못하자, 결국 거짓 증인들을 내세우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스데반을 공의회로 끌고 갑니다. 그들은 스데반이 거룩한 곳(성전)과 율법을 모독하고, 예수께서 이곳을 헐고 모세의 전통을 고칠 것이라 말했다며 거짓 고소를 일삼습니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위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게 흐를 때(7절) 본능적으로 저항하는 어둠의 영적인 공격(8절 이하)이 시작된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이 대목에서 우리의 시선을 깨우십니다. 세상은 우리가 적당히 평안하게 지낼 때는 공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은혜가 고압으로 흐르기 시작할 때, 세상의 저항 또한 동일한 고압으로 닥쳐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아무런 저항이 없다면, 혹시 내 안에 복음의 능력이 강력하게 흐르지 않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말씀은 우리의 삶을, 공동체를, 세상을 뒤흔들고 새롭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진짜 결론은 스데반이 겪는 억울함이나 앞으로의 순교에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거짓 고소와 분노로 가득 찬 공의회 한복판에 선 스데반의 '얼굴'에 주목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쏘아보았지만, 스데반의 얼굴은 마치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기록합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 앞에서, 거짓이 난무하는 현장 속에서 어떻게 이런 얼굴이 가능했을까요? ​스데반이 천사의 얼굴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신을 향한 거짓 고소나 분노한 사람들의 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