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요약] 기도 없이 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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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에베소서 6장 19절 ~ 20절 (참고: 고린도전서 2장 4절 ~ 5절) 1. 전신갑주의 완성, 기도의 연료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를 마무리하며 영적 전쟁을 위한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갑주를 입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동차에 성능 좋은 엔진이 있어도 연료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듯이, 전신갑주라는 무기가 실제적인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연료는 바로 '중보기도' 입니다. 기도의 연료가 채워질 때 비로소 우리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2. 기도를 부탁하는 겸손: "혼자 설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바울은 모든 영적 원리를 가르친 후, 마지막으로 성도들에게 "나를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합니다. 연약함의 인정: 바울은 자신이 완벽하거나 이미 다 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 또한 언제든 흔들리고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고백하며 도움을 구했습니다. 참된 믿음의 증거: 기도를 요청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믿음을 끝까지 지키고 싶어 하는 간절함 의 표현입니다. 혼자 버티는 신앙은 교만일 수 있으며, 진짜 믿음은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어 공동체의 기도를 요청할 줄 아는 겸손에서 시작됩니다. 3. 첫 번째 기도 제목: "지혜가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바울은 자신이 입을 열 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말씀의 다스림: 바울은 누구보다 지식이 풍부하고 경험이 많았지만, 자신의 지식으로 말씀을 다루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다스리고 다루기를 구했습니다. 성령의 증거 (고전 2:4-5): 바울의 설교는 사람의 지혜에서 나온 그럴듯한 말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증거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논리적인 설명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각 사람의 심령에 닿을 때만 가능하기 때...

[씨앗 칼럼] 섬김은 마음을 읽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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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흔히 누군가를 위해 시간과 물질을 쓰고, 내가 조금 손해를 보면 그것이 섬김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헌신은 매우 귀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꼭 돌아보아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이 섬김은 누구를 위한 섬김인가?” 아무리 선한 의도로 시작한 섬김이라도, 받는 사람이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이 무거워진다면 그 섬김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섬김은 ‘내가 얼마나 했는가’보다 ‘상대가 어떻게 느끼는가’ 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이 사실을 깨닫게 한 경험이 있습니다. 군대에서 장교 훈련을 받던 시절, 함께 생활하던 한 동기 훈련생이 참 힘들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배려하고, 도와주고, 신경을 쓰며 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친구가 제게 크게 화를 냈습니다. 아마도 저의 섬김이 그에게는 위로가 아니라 ‘내가 부족한 사람으로 보인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저는 중요한 것을 배웠습니다.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한 일이라도, 그것이 상대를 높이지 못하면 참된 섬김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섬김은 나의 만족이나 선함을 증명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섬김은 상대를 존중하고, 그 사람의 마음과 자리에서 함께 서는 일입니다. 그래서 섬김에는 늘 겸손과 기다림, 그리고 질문이 필요합니다. “내가 도와줄까?”   “이게 괜찮을까?”   “너는 어떻게 느낄까?” 섬김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섬김을 통해 사랑은 말이 아니라 삶이 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상대가 기쁨으로 받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생명을 살리는 섬김이 됩니다. 씨앗교회가 세상 가운데 흘려보내고 싶은 섬김은 크고 드러나는 섬김이 아닙니다. 마음을 읽고, 자존심을 지켜주고, 상대를 한 사람으로서 존귀하게 세워 주는 섬김이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손길이 누군가의 마음을 덥히는 따뜻한 씨앗이 되기를 바랍니다. 🌱

[주일 설교 요약] 치유를 위한 공동체 기도: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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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마가복음 2장 1-12절 우리는 지난 시간 '전신갑주'를 입고 '합심 기도'로 승리하는 법을 나누었습니다 . 오늘은 공동체 기도의 마지막 주제로, 우리 안에 실제적인 회복과 치유 를 일으키는 '공동체 치유 기도' 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의 치유도 함께 일어납니다 . 1. 치유의 시작은 '능력'이 아니라 '긍휼'입니다 가버나움에 계신 예수님께 네 명의 친구가 중풍병자를 데리고 옵니다. 꼼짝 못 하는 친구를 침상째 메고 온 것입니다 . 우리는 흔히 치유 기도를 하려면 대단한 '영적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주저합니다 . 하지만 이 네 친구를 움직인 동력은 능력이 아니라, 아픈 친구를 불쌍히 여기는 '긍휼(사랑)' 이었습니다 . 예수님의 마음도 동일합니다. 병자를 보실 때 늘 "불쌍히 여기사" 치유하셨습니다 . 우리에게 능력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아픈 지체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의 마음만 있다면 우리는 그를 예수님께로 데려갈 수 있습니다 . 2. 공동체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 죄가 용서받았다" 고  말씀하십니다.  (막 2:5)  여기서 '그들'은 복수형입니다. 환자 혼자가 아니라, 그를 메고 온 네 친구의 믿음 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때로는 환자 자신이 너무 아프고 낙심하여 믿음을 가질 힘조차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공동체의 믿음 이 그를 떠받칩니다 . 내가 믿음이 부족해도,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공동체의 믿음을 보시고 주님은 역사하십니다 . 3. 포기하지 않고 대가를 지불하는 기도 (지붕을 뚫다) 사람이 너무 많아 예수님께 갈 수 없자, 친구들은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환자를 달아 내렸습니다 .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씨앗 칼럼] 쌀과 귤 사이에 담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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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처가는 제주도입니다. 제주라는 이름만으로도 마음이 먼저 열리는 곳입니다. 쉽게 갈 수 없기에, 갈 때마다 그 섬의 빛과 바람과 풍경을 더 깊이 품게 됩니다. 가야만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제주를 더 특별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그 특별함 뒤에는 늘 아쉬움이 남습니다. 자주 갈 수 없기에 그곳에 살고 있는 형제들을 만나는 시간은 늘 부족합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함께한 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사는 곳이 멀어질수록 마음도 어느새 기억 속으로만 남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저에게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다리기만 하지 말고, 내가 먼저 마음을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그들에게 내가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나 역시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추석의 이천 쌀’이었습니다. 이천 하면 쌀이 떠오르듯, 제 마음을 담아 형제들에게 쌀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말보다 크지 않은 선물이었지만, "당신을 생각하고 있습니다"라는 마음을 담기에는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시작은 다른 기쁨으로 다가왔습니다. 어느새 집에는 귤이 풍년이 들었습니다. 제주에 있는 형제들이 정성껏 귤을 보내 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섬기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교회 식구들과 함께 나눌 수 있도록 넉넉하게 보내 주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한 일입니다. 제주에도 이천 쌀은 있고, 이천에도 제주 귤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서 먹는 쌀과, 누군가가 기억하며 보내 준 쌀은 다릅니다. 내가 골라 먹는 귤과, 마음을 담아 건네준 귤은 그 맛이 다릅니다. 나를 잊지 않기 위해 시작했던 쌀 보내기는, 이제 사랑의 귤로 돌아와 제 마음을 기쁘고 풍성하게 채워 줍니다. 작은 관심 하나가, 작은 사랑 하나가, 누군가의 마음을 만지고 또 다른 사랑으로 자라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습니까? 한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사람, 안부가 ...

[주일 설교 요약] 사막을 숲으로 바꾸는 '합심 기도'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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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문: 마태복음 18장 19-20절 지난 시간 우리는 왕적인 선포 기도와 제사장적인 중보 기도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나눴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강조하신 '교회적 중보 기도' , 즉 '합심 기도' 의 승리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1. 사막을 숲으로 만든 기적 (함께함의 능력) 중국의 마오우쓰 사막(毛烏素沙漠)에는 '살아 움직이는 모래 언덕'이라 불릴 만큼 척박한 땅이 있었습니다. 이곳에 시집온 인위쩐(殷玉珍)이라는 여인은 절망적인 환경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남편과 마음을 모아 나무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600그루 중 500그루가 죽어도, 살아남은 100그루를 보며 20년 넘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황량했던 사막은 거대한 숲으로 변했고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혼자라면 불가능했을 일이지만,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았기에 사막이 숲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합심할 때, 영적인 사막은 하나님의 숲으로 변합니다. 2. '두 사람'이 '합심'하여 (심포니의 원리) 예수님께서는 "땅에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합심하여 구하면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 18:19) 최소 단위의 공동체: '두 사람'은 단순한 숫자가 아닙니다. 공동체를 이루는 최소 단위입니다. 아모스 3장 3절 말씀처럼, 뜻이 같지 않으면 동행할 수 없습니다. 합심(Symphony): '합심하여'라는 원어는 '심포니(Symphony)'와 어원이 같습니다. 각자의 소리가 아닌, 하나의 조화된 울림 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숫자의 많고 적음보다, 갈라지지 않고 하나 된 마음의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가 하나 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내 생각과 감정이 아닌 예수 이름이 중심이 될 때, 주님은 "나도 그...

[씨앗 칼럼] 첫눈, 그리고 함께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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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이 내렸습니다. 어릴 적엔 눈이 오면 세상이 하얀 동화책처럼 열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동네 아이들과 한바탕 뛰놀고, 서로 눈을 털어주고, 함께 눈을 치우며 웃음이 끊이지 않던 그때. 그 시절의 첫눈은 그저 ‘기쁨’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어른이 되어 맞는 첫눈은 전과 다릅니다. 눈은 더 이상 설렘보다는 ‘해야 할 일’, ‘책임’으로 다가옵니다. 교회 주변의 경사진 도로를 치우지 않으면 차들이 지나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눈이 내릴 때마다 삽을 들고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동네분들이 안전하게 오고 갈 수 있도록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하는 그 일을 말입니다. 사실 몸보다 더 힘든 것은, 그 일을 알아주는 이가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점점 더 개인으로 향하고, 서로의 필요를 대신 채워주던 따뜻한 마음들이 희미해져 갑니다. 눈이 오면 누군가는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다들 알지만, 그저 각자의 눈앞의 일에 바빠 마음을 돌리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고단한 자리에 제 딸과 아들이 함께 삽을 들고 나왔습니다. 말없이 옆에 서서 눈을 치우기 시작하는 아이들. 그 순간 눈보다 더 따뜻한 무언가가 마음속에 소복하게 쌓였습니다. "아, 함께 한다는 건 이런 힘이구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 걷는 길은 때로 너무 춥고 외롭습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곁에서 함께 걷는다면 그 길은 전혀 다른 길이 됩니다. 힘이 나고, 외롭지 않고, 다시 걸어갈 용기가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공동체를 주신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요? 씨앗교회에는 제가 혼자가 아니게 해주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울고, 함께 웃고, 함께 길을 치우는 사람들. 여러분 덕분에 제 마음에 감사가 쌓이고 첫눈처럼 포근한 기쁨이 내려앉습니다.  올해 첫눈을 맞으며 다시 깨닫습니다. 혼자는 힘들지만, 함께라면 따뜻해집니다. 함께라면 길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함께라면 우리는 다시 힘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씨앗 식구들이 함께 있어서, 저는 참 ...

[주일 설교 요약] 개인과 공동체의 운명을 바꾸는 중보기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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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문: 디모데전서 2장 1-2절 / 히브리서 7장 25절 / 로마서 8장 34절 지난 시간, 우리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한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가 우리에게 경건하고 평화로운 삶을 가져다주는 영적 통로임을 살펴보았습니다 . 오늘은 이 중보기도가 왜 우리에게 중요한지,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하는지,  예수님의 현재 사역 을 통해 깊이 알아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신가?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신 후에도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십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중보' 하고 계심을 두 가지 측면에서 보여줍니다. 대제사장적 중보 (히 7:25):  예수님은 늘 살아 계셔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위해 간구하십니다 .  이는 우리의 죄를 중재하고, 사탄의 고발을 막아내며, 우리의 구원이 끝까지 완성되도록 도우시는 사역입니다 . 왕적 중보 (롬 8:34):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오른쪽, 통치의 자리)에 계십니다 . 이는 왕으로서 통치하며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가 임하고, 악의 세력이 무너지도록 다스리시는 기도입니다 .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 (요 14:12)이라며, 우리를 이  왕적이고 제사장적인 기도의 자리로 부르셨다는 사실 입니다 . 2. 우리가 드려야 할 '왕적인 기도' (선포와 통치) 왕적인 기도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이 땅에 선포하는 기도입니다. 악을 꺾는 선포:  단순히 "힘들어요"라고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이름의 권세로 악한 세력(두려움, 우울, 분열, 미움 등)을 향해 "떠나갈지어다"라고 명령하고 선포하는 기도입니다 . 하나님의 질서를 세움 (창조적 기도):  악이 떠난 자리에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것입니다.  혼돈이 질서로, 어둠이 빛으로 바뀌듯, 우리 가정과 교회에 하나님의...